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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구 다리의 세로 줄무늬는 어떻게 탄생했나? [김신의 가구 이야기] ④

by 기타치는목수 posted May 01,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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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시 인류의 가구부터 고대와 중세를 거쳐 근대에 이르기까지. 가구 디자인의 본질을 건축 역사와 함께 살펴본다.
나아가 현대 가구에서 과거의 유산이 어떻게 드러나는지도 소개한다. ​

 

 

 

근대 이전의 유럽 가구들을 보면 다리에 세로 줄무늬가 나 있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특히 18세기 중엽부터 유행하기 시작한 신고전주의 가구에는 거의 예외 없이 적용돼 있다. 다리가 기능적으로 반드시 필요할 뿐만 아니라 다리의 조형이 가구의 조형을 통제하고 결정하는 테이블과 의자에서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이것을 전문 용어로 ‘플루티드 레그fluted leg’라고 한다. 플루트flute 또는 플루팅fluting은 표면에 세로로 길게 파진 홈을 뜻한다. 가구의 다리에 새겨진 플루팅은 사실 건축에서 시작된 것이다. 건축에서는 뚜렷한 기능이 있었지만, 다리에 새겨진 플루팅은 겉모양만 흉내 낸 장식으로 바뀌었다. 기능적 욕구로 디자인된 어떠한 형태가 형식적인 장식으로 변화하는 것은 모든 디자인에서 아주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번 시간에는 그 과정을 추적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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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고전주의 테이블 드로잉, 디자인: 로버트 애덤, 18세기 중반. 테이블의 다리에 세로 홈이 파져 있다.
ⓒHarris Brisbane Dick Fu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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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루팅(fluting)은 표면에 세로로 길게 파낸 홈(groove)을 뜻한다.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은 서양 건축과 디자인의 규범과도 같은 존재다. 이 신전에서 발견할 수 있는 여러 디자인 요소 중 이번 글에서는 기둥, 즉 칼럼에 대해 서만 이야기해 보기로 한다. 서양 건축의 기둥은 칼럼column, 피어pier, 필로티piloti, 포스트post 등 그 존재 방식에 따라 다양한 용어로 구별된다. 그 중에서 칼럼은 고대 근동, 이집트, 그리스에서 나타난 ‘원형 기둥’을 뜻한다. 고대의 신전은 초기에는 나무로 만들었다. 나무의 둥근 형태를 그대로 썼기 때문에 초기 신전 기둥은 원형이었다. 크레타 섬의 고대 유적지 크노소소에 있는 미노스 궁전의 원형 기둥도 석재가 아니라 목재로 만든 것이다. 나중에 석재 신전을 만들 때 초기 신전의 형태를 똑같이 모방했기 때문에 신전 기둥은 둥근 형태를 갖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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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1900년경에 만들어진 크노소스의 미노스 궁전 칼럼. 
붉은색 기둥은 오늘날 석조로 복원되었지만, 원래는 목재로 만들었다. 
ⓒOlaf Tausch 

 

 

목재는 긴 기둥을 한 번에 얻을 수 있지만, 석재로 한 번에 기다란 기둥을 만드는 건 불가능하다. 고대 신전의 기둥은 10미터 안팎이다. 긴 것은 10미터가 훨씬 넘는다. 그런 기둥을 만들려면 마치 벽돌을 쌓아서 높은 벽면을 만들듯이 ‘드럼drum’이라는 작은 단위의 원형 기둥을 겹겹이 쌓아 올릴 수밖에 없다. 드럼은 이름처럼 실제로 악기 드럼처럼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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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림피아 제우스 신전의 기둥. 무너진 기둥을 보면 기둥이 작은 드럼들의 조각으로 구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Jebulon 

 

 

이렇게 작은 드럼들을 쌓아 올리면 드럼과 드럼 사이에 강한 가로 선이 눈에 띄게 된다. 고대의 건축가들은 이런 가로 선을 시각적 결함으로 여겼다. 이를 감출 방법은 없을까? 세로의 홈을 파는 것이다. 세로로 홈을 파내면 기둥이 빛을 받았을 때 세로의 그림자가 연속해서 드리우며 강력한 시각적 리듬을 만들어낸다. 20세기에 건설된 워싱턴의 링컨 기념관 칼럼을 보면 세로 홈이 빛을 받아 강렬한 그림자의 계조를 만들고 있다. 이 세로 선이 훨씬 강하기 때문에 가로의 선은 자연스럽게 눈에 띄지 않게 된다. 또한 세로의 선은 기둥을 더 둥글고 더 길게 보이도록 만드는 시각적 효과까지 창출한다. 그로 인해 신전의 기둥은 대단히 세련돼 보인다. 이 세로 홈은 가로의 선을 약화시키려는 분명한 기능으로 태어났지만, 결과적으로 장식적인 역할까지 수행하게 된 것이다. 이런 세로 홈을 ‘플루트flute’ 또는 ‘플루팅fluting’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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링컨 기념관의 플루팅 기둥
 ©azucaro  

 

 

그리스 신전의 기둥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양식을 진화시켰다. 초기 도리아 양식에서 이오니아 양식을 거쳐 코린트 양식으로 발전한다. 도리아 양식의 플루팅은 홈을 파내서 홈과 홈 사이에 날카로운 모서리 선이 생긴다. 이 모서리가 풍화에 의해 부서지는 일이 발생했다. 이에 따라 홈과 홈 사이의 모서리를 없애고 평평한 면을 갖게 만든 '케이블 플루팅cable fluting'이 이오니아 양식 칼럼에서 나타났다. 그 뒤 모든 칼럼은 케이블 플루팅을 적용하게 된다. 세로 홈을 ‘플루팅’이라고 부르고, 플루팅과 플루팅 사이의 평평한 면을 ‘필레fillet’라고 부른다. 케이블 플루팅에서는 플루팅과 필레가 연속에서 교차하는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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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리아 양식, 이오니아 양식, 코린트 양식의 칼럼들. 이오니아 양식부터 케이블 플루팅이 적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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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블 플루팅에서는 플루팅과 플루팅 사이에 평평한 면인 필레(fillet)가 있다. 
©Alexisrael 

 

 

플루팅 기법은 고대 그리스 시대의 가구에 이미 나타났을 것으로 추정한다. 하지만 무덤 속에 곱게 보관된 이집트 가구와 달리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가구는 현대까지 살아남은 것이 거의 없다. 대신 신고전주의가 유행하기 시작한 18세기 중반부터 테이블과 의자, 책상, 수납장의 다리에 플루팅 기법이 빈번하게 쓰이는 걸 볼 수 있다.(아래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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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고전주 양식의 캐비닛 온 스탠드(cabinet on stand), 디자인: 애덤 와이스와일러, 1790년경. 
다리에 케이블 플루팅이 적용되어 있다. 
©Metropolitan Museum of Art 

 

 

 

플루팅이 적용된 가구는 신고전주의 이전 르네상스와 바로크 시대에도 존재했다. 루이 14세가 총애했던 가구 장인 중 한 명인 피에르 골은 신전의 기둥과 흡사한 다리를 적용한 테이블을 디자인했다.(아래 사진)

 

 

바로크 양식 테이블, 디자인: 피에르 골, 1660년경.
다리가 신전의 기둥처럼 생겼다.
©Metropolitan Museum of Art

 

 

플루팅은 반드시 다리에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영국의 가구 장인 토마스 치펜데일 스타일로 디자인된 롤탑 데스크(아래 사진)를 보자. 롤탑 데스크는 둥그런 뚜껑으로 상판을 덮을 수 있는 책상이다. 이 테스크의 옆면에는 그리스 신전의 칼럼을 납작하게 부착했다. 이렇게 칼럼을 모방한 평면적인 장식을 ‘필라스터pilaster’라고 부른다. 필라스터는 원래 건물 벽면에 적용한 것인데, 이를 가구에서 모방한 것이다. 이 롤탑 데스크를 앞에서 보면 서랍에도 케이블 플루팅이 적용된 걸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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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롤탑 데스크의 옆면에 적용된 플루팅 기법 (오른쪽) 롤탑 데스크의 서랍 앞면에 적용된 플루팅 기법
©Metropolitan Museum of Art

 

 

플루팅이 건축에 적용된 데에는 기능적 명분이 있다. 즉 보기 흉한 가로의 선을 시각적으로 약화시키는 것이다. 하지만 가구의 다리는 나무로 만들고 드럼을 쌓아서 만드는 것이 아니므로 가로의 선이 생기지 않는다. 따라서 가구에 적용된 플루팅은 순전히 장식적인 용도만을 갖는다. 이처럼 가구에서는 건축을 모방하는 과정에서 기능은 사라지고 형식만 남게 되는 경우를 흔히 볼 수 있다. 이렇게 모방 과정에서 기능은 없고 단지 시각적인 형식만 모방하는 것을 ‘스큐어모프skeuomorph’라고 한다. 우리 주변에는 스큐어모프가 굉장히 많다. 그런데 이것은 건축 자체에서도 흔히 나타나는 현상이다. 다음 글에서는 서양 건축과 디자인의 영원한 규범인 '오더order'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글 | 김신 디자인 칼럼니스트

(designpress2016@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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