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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크, 오더(order)의 과장과 왜곡 [김신의 가구 이야기] ⑩

by 기타치는목수 posted May 03,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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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시 인류의 가구부터 고대와 중세를 거쳐 근대에 이르기까지. 가구 디자인의 본질을 건축 역사와 함께 살펴본다.
나아가 현대 가구에서 과거의 유산이 어떻게 드러나는지도 소개한다. ​

 

 

 

15세기 이탈리아 피렌체는 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가 된다. 금융과 무역, 양모 산업 등으로 큰 부를 쌓은 상인들은 ‘팔라초palazzo’라는 이탈리아식 궁전을 짓고 내부는 당대 최고의 화가와 조각가들에게 의뢰해 화려하게 장식한다. 이때 1천 년 이상 중단되었던 고전 양식의 핵심인 오더*order: 기둥인 칼럼과 보인 엔타블라처의 구성 조합 가 부활했다는 이야기는 지난 글에서 밝힌 바 있다. 16세기 전반기에는 다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같은 위대한 르네상스의 대가들이 최고의 걸작들을 쏟아냈다. 당시 금융재벌인 메디치 가문은 막강한 금력을 바탕으로 피렌체는 물론 로마 교황청까지 자신들의 영향력을 키우고 있었다. 피렌체 공화국의 수장인 로렌초 데 메디치는 교황 인노센트8세를 설득하여 자신의 둘째 아들 조반니 데 메디치를 불과 13세 나이에 추기경에 임명하도록 한다. 조반니 데 메디치는 결국 37세의 나이에 교황에 선출된다. 그가 바로 종교개혁의 불씨를 당기게 한 장본인 레오 10세 교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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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레오 10세, 그림: 라파엘로, 1518-20년경 

 

 

조반니 데 메디치는 메디치 가문을 일으킨 코지모 데 메디치의 증손자다. 코지모부터 메디치 가문은 막대한 돈을 예술 후원에 쏟아 부었다. 예술 후원은 순수하지만은 않은 것으로 권력을 강화하는 데도 큰 역할을 한다. 15세기 예술가인 도나텔로와 보티첼리부터 16세기의 거장 미켈란젤로와 라파엘로에 이르기까지 이들 가문의 후원을 받지 않은 예술가가 없을 정도였다. 이런 가문의 분위기 속에서 자란 조반니는 교황이 되자마자 학문과 예술을 장려하는 것은 물론 온갖 사치를 부림으로써 교황청의 재정을 바닥낸다. 그는 성 베드로 성당을 다시 짓고자 하는 거대한 프로젝트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면죄부를 남발한다. 면죄부는 당시 신성로마제국이었던 독일 지역에서 가난한 하층민들에게조차 자비 없이 강제로 판매되었다. 이에 반발해 종교개혁이 거세게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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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가 구상한 성 베드로 성당의 입면과 돔, 1547년

 

 

바로크 양식은 로마 가톨릭이 종교개혁에 반대하는 과정에서 발달했다. 신교가 절제와 검소를 추구하고, 화려한 교회를 거부하는 것과 반대로 구교는 더욱더 화려하게 교회를 치장하기에 이른 것이다. 특히 교회 내부를 감정적으로 격앙시키는 프레스코와 연극적인 여러 장치들로 꾸몄다. 바로크 예술의 대가 중 한 명인 잔 로렌초 베르니니가 디자인한 성 베드로 성당의 발다친Baldachin은 바로크 양식을 대표하는 구조물이다. 발다친은 ‘닫집’으로 번역할 수 있는데, 이것은 성스러운 성당 내부에 더욱 성스러운 장소를 만든 것이다. 제단 위에 놓인 발다친은 기둥과 그 위에 지붕이 있는 구조다. 여기에도 오더가 적용되어 있다. 나선형으로 돌아가는 기둥으로 화려하게 디자인된 발다친은 높이가 무려 28미터가 넘고, 정교하게 장식된 커다란 코니스 위에는 사람보다 두 배나 큰 청동 천사 조각들이 놓여 있다. 이 거대한 발다친은 당시 로마 교황청 1년 예산의 10분의 1을 썼다고 할 정도로 막대한 비용이 들었다. 발다친의 기둥들은 모두 나선형으로 굽이치고 있는데, 이를 ‘솔로몬 칼럼Solomonic column’이라고 부른다. 솔로몬 칼럼은 바로크 가구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많은 바로크 의자와 캐비닛이 솔로몬 칼럼을 모방해 다리를 디자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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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성 베드로 성당의 발다친(Baldachin), 디자인: 잔 로렌초 베르니니, 1623-1634년. ©Jebul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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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바로크 양식 의자가 솔로몬 레그(solomonic leg)로 디자인되었다. ©Hallwyl Museum 

 

 

바로크 건축은 파사드에서 더욱 뚜렷하게 르네상스 양식과 구별된다. 르네상스 시대의 파사드는 평면적이었다. 초기 르네상스 건축물인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의 정면을 보면 화려하게 치장된 것 같지만, 그것은 조각적인 것이 아니라 회화적인 것이다. 즉 정면은 평면적이고 그 위에 그림으로 장식을 한 것이다. 장식된 패턴은 대단히 기하학적이어서 질서정연하다. 이 성당은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건축가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가 디자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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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 디자인: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 1470년 ©Jebulon 

 

 

반면에 바로크 건축을 대표하는 산 카를로 알레 콰트로 폰타나 성당을 보자. 이 성당의 코니스 *cornice: 건물 지붕 부분에서 밖으로 튀어나온 처마 같은 부분 는 직선이 아니라 곡선이다. 그것도 저층부의 코니스와 상층부의 코니스가 다른 곡선이다. 저층부의 코니스는 부드러운 곡선으로 연결되어 있지만, 상층부의 코니스는 날카로운 모서리를 남기고 있다. 코니스가 심하게 휘어져 있으므로 장식대의 역할을 하는 프리즈 역시 같은 곡률로 휘어져 있다. 이러다 보니 건물의 파사드가 물결처럼 울렁거린다. 기둥에 의해 분할된 면들은 안쪽을 파내 조각으로 장식되어 화려하다. 이 성당을 디자인한 건축가는 프란체스코 보로미니다. 보로미니는 성 베드로 성당의 발다친을 디자인한 잔 로렌초 베르니니와 함께 바로크를 대표하는 예술가이며 평생의 라이벌었다. 보로미니의 건축은 전통적인 고전 건축에서 많이 벗어나 연극적이고 환상적인 파사드를 연출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부드럽고 사교적인 베르니니와 달리 타협을 할 줄 모르는 경직된 성격 때문에 건축 프로젝트를 진행하다가 건축주로부터 퇴출 당하기를 반복했다. 보로미니는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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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카를로 알레 콰트로 폰타나 성당, 디자인: 프란체스코 보로미니, 1646년 ©Architas

 

 

‘바로크baroque’라는 프랑스 단어는 포르투갈어 ‘barroco’에서 유래했다고 하는데, 그 뜻은 ‘일그러진 진주’다. 산 카를로 알레 콰트로 폰타나 성당의 파사드에서 보이는 이러한 과장된 왜곡의 표현을 보면, 그 뜻이 일리가 있어 보인다. 바로크 말기에 완공된 시라쿠스 성당의 기둥은 정면에서 앞으로 상당히 많이 튀어나와 있다. 또한 기둥은 두 개가 하나의 쌍을 이루고 있다. 이렇게 기둥들이 돌출되어 있으므로 코니스는 앞으로 튀어 나왔다 뒤로 물러나기를 반복한다. 이렇게 바로크 시대의 오더는 고전적인 오더와 견주면 대단히 과장되고 왜곡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복잡하고 입체적이다. 이런 오더의 구성이 건물의 파사드를 드라마틱 하게 만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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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라쿠스 성당, 1753년 ©pjt56 

 

 

바로크 시대의 가구는 자연스럽게 바로크 건축의 파사드를 모방하게 된다. 특히 캐비닛은 바로크 성당의 파사드를 그대로 옮겨온 듯하다. 캐비닛은 다른 가구와 달리 넓은 표면을 갖고 있어서 그 표면을 건축의 파사드처럼 연출하기 쉽다. 프랑스 건축가 프랑수아 망사르가 디자인한 발 드 그라스 성당의 정면은 바로크 양식의 특징들을 잘 보여준다. 쌍기둥couple column, 코니스가 돌출되고 후퇴하는 입체적인 평면, 벽감을 만들어 그곳에 조각을 안치한 것 등이 그것이다. 또 하나 흥미로운 것은 위층과 아래층의 가로폭 차이를 자연스럽게 연결하고자 볼루트 *volute: 소용돌이 장식를 디자인한 것이다. 대개 성당의 정면은 아래층 폭이 위층 폭보다 넓다. 바로크 시대 건축가들은 이런 차이가 부자연스럽다고 보고 그것을 장식적인 구조물인 볼 루트로 연결한 것이다.(아래 사진에서 붉은색 네모 부분) 바로크 캐비닛은 이런 건축의 어휘들을 그대로 가져온다. 캐비닛 정면 중앙에도 오더의 형식을 갖춘 신전의 압축된 파사드가 그대로 재현되어 있다. 또한 윗부분의 압축된 파사드는 밑부분보다 폭이 훨씬 작다. 그에 따라 볼 루트 장식(붉은색 부분)을 붙여 건축을 그대로 모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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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발드 그라스 성당, 디자인: 프랑수아 망사르, 1667년. © DXR 
(오른쪽) 바로크 캐비닛, 디자인: 지아코모 헤르만, 1675년. 사진출처: www.alaintruong.com 

 

 

바로크 캐비닛의 정면을 더욱 화려하게 해주는 것은 ‘피에트라 듀라 pietra dura’라는 공예 기법이다. 피에트라 듀라는 광택이 나는 돌을 상감기법으로 묘사한 것으로 이탈리아 바로크 가구에서는 주로 새와 네발 짐승, 꽃과 나뭇잎, 때로는 정교하고 복잡한 역사화 등을 재현하고 있다. 바로크 캐비닛의 표면은 작은 서랍들이 규칙적으로 배열되어 있는데, 이 서랍의 표면이 모두 피에트라 듀라 패널로 사치스럽게 장식되어 있다. 이렇듯 바로크 캐비닛은 전반적으로 건축을 닮았고, 그 표면 장식은 회화적이다.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바로크 양식은 프랑스로 전해져 태양왕 루이 14세 시대에 절정을 맞이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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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크 캐비닛, 1606-23년경. 사진출처: www.metmuseum.org 

 

 

글 | 김신 디자인 칼럼니스트

(designpress2016@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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